1.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는 힘, 가정예배
코로나19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하나님 앞에 머무는 거룩한 습관과 신앙의 구심점이 절실했다. 비대면 환경에서도 거리두기가 어려운 대상이 가족이기에 가정이야말로 제약 없이 예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예배는 사람을 대면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이다. 어떤 상황에도 그분과 대면하며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가정예배를 붙들었다. 가정예배는 어떤 선택이나 대안이 아니다. 세대의 단절과 분리가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간 스스럼없는 대화와 관계 회복,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연합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을 알고 예배를 통해 비책이 아닌 본질을 추구해야 할 때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배하는 가정을 찾으신다.
가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자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곳이다. 혈연 공동체를 넘어 말씀을 소유한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이고,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감사의 자리다. 신앙은 교육이 아닌 삶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공동체인 가정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예배자로 함께 살아내는 과정이다. 가정예배를 ‘신앙교육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도 삶을 통해 배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정예배는 신앙교육에 열정적인 부모의 전유물이나 믿음의 가문에 주어지는 특권도 아니다. 남녀노소, 자녀 유무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한 모든 가정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영적 행위다. 신앙 수준과 관계없이 사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가정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그런 가정의 문화를 세워갈 수 있다. 그 러기 위해 하루 빨리 가정예배에 대한 고정관념과 무관심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2. 자녀를 예배 인도자로 세우기
필자의 가정은 남편부터 막내까지 모두가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한다. 전통적인 가정예배를 고수하는 가정이라면 반드시 가장 혹은 어른이 예배 인도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예배자가 될 수 있고, 예배 인도자도 될 수 있다. 자녀를 예배자로 세우려면 부모가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본을 보이며 예배자로 함께 서는 것이다. 자녀의 믿음과 변화는 부모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가정은 아이의 말문이 트이면 예배 인도자로 세웠다. 그래서 아이들이 첫 예배를 인도했던 시기가 대략 서너 살쯤이었다. 아이들도 예배 인도자의 자리를 사모하고 그 자리에 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부모와 형제가 인도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첫 시작이었다. 그렇게 학습된 예배는 점차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재구성되어 다양한 예배가 되었고, 키와 믿음과 지혜가 자라듯 아이들이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도 자라났다. 교회 공적인 예배에서는 어린아이를 예배 인도자로 세우는 게 어렵지만 가정예배이기에 가능하다. 가정예배 안에 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고 가정예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 온 가족이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인도자로 서면 가족 모두가 그 권위에 순복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지위와 나이와 권위를 떠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같은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도 인도자의 자리에 설 때는 책임감을 갖도록 가르친다.
정신없이 일상을 살다가 예배를 놓치기라도 하면 아이들이 앞장서서 예배를 드리자고 나선다. 피곤을 견디지 못해 일찍 잠든 날이면 아이들이 예배 시간을 알리며 하나둘 깨우러 온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어느 날, 아이들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엄마가 오늘 너무 피곤하신 것 같아. 그냥 주무시게 우리끼리 예배드리자. 오늘 예배 인도 누구지?”
비몽사몽 중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예배 소리가 달콤한 자장가 같았다. 장례나 급한 일로 함께 예배할 수 없을 때는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로 모였다. 아이들을 예배자로 세운 덕에 예배를 놓치지 않고 드릴 수 있었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하지 못해도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예배 인도자로 세우면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배 인도자로 선 경험은 훗날 가정을 이룬 후에도 변함없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영적인 안전장치가 될 줄 믿는다.
3. 갈등과 화해의 열쇠
어느 날, 남편과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서로의 마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예배 시간이 다가오니 부담이 되었다. 하필 이날 예배 인도자가 필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엄마, 오늘은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싶은데 저랑 순서 좀 바꿔주실래요?”
둘째 아이의 제안에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흔쾌히 수락했다. 예배가 시작되자 둘째가 말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두 명씩 짝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호명하는 분들은 짝을 지어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조이 형과 시온이, 사랑이는 저와 마주 보고 앉아주세요.”
무거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남편과 마주 앉았다.
“둘이 손을 잡고 바라보며 <축복송>을 부르겠습니다.”
남편과 억지로 손끝을 걸쳤지만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 채 기계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눈 후 포옹한 채 기도하겠습니다.”
이쯤 되니 아이들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집 안의 냉기를 감지한 아이들의 묘책이었다. 킥킥거리며 새어 나오는 사 남매의 웃음소리가 부부의 닫힌 마음의 빗장을 풀었고 가정을 데우는 온기가 되었다.
“오늘 제가 예배 인도하길 잘했죠?”
너스레를 떠는 둘째가 마냥 예뻐 보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나누었다. 늘 아이들을 중재하고 예배를 화평과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 여겼는데, 어느새 부모의 부족한 모습까지 보듬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부모도 실패를 인정하고 잘못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지만 갈등과 화해의 열쇠이기도 하다. 가정의 회복, 자녀 관계 개선, 부부의 연합이 필요하다면 예배로 나아오길 바란다. 죄인인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용납과 용 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내 연약함과 힘듦을 나누며 우리의 왕이요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그분이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시고 가정 가운데 축복을 부어주실 줄 믿는다.
4. 희로애락이 있는 가정예배
필자의 가정도 날마다 행복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고, 인내하지 못한 노여움으로 힘들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정예배의 희로애락 가운데 함께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의지하면 예배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다.
희(喜) 기쁨 더하기(+)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리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것에 유연하게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부모는 자녀의 의견과 정서에 충분히 공감해주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행복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면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가정예배가 될 때 구원의 기쁨과 더불어 삶의 기쁨도 더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로(怒) 노여움 빼기(-)
사단은 가장 중요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분열을 조장하거나 일을 그 르치게 만든다. 우리가 잠깐 방심하는 틈을 기가 막히게 안다. 가정과 내 연약한 곳을 집중 공략하여 예배를 포기하게 만든다. 가정예배가 그들에게는 절대 허용하지 말아야 할 방해물인 셈이다. 우리 가정도 16년째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노여움 없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임을 망각하는 순간 노여움의 싹이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부모의 권위를 이용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자. 부모가 먼저 진정한 예배자가 될 때 자녀들도 작은 예배자로 함께 성장할 것이다.
애(哀) 슬픔 나누기(÷)
가정은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공유하고 수용하는 곳이다. 그래서 절망과 낙심, 슬 픔과 애통, 상처와 실망, 고통과 괴로움 등 모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기도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가정예배 안에서 사랑으로 위로하고 용서와 용납으로 하나 될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줄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하나 되는 가정이 되자.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붙드시고 참 평안과 위로로 함께하실 것이다.
락(樂)즐거움 곱하기(×)
가정예배에 즐거움을 더하자. 예배의 행복 지수가 배가될 것이다. 부모가 알아서 즐거운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지만 예배를 풍성하게 채울 다양한 요소를 자녀와 함께 고민해보길 바란다. 예상치 못한 은혜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어린아이와 함께 예배할 땐 철저하게 어린 예배자의 눈높이에 맞춰 예배드리길 바란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만큼 예배의 모습도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하신다(시 68:3).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족이 모여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자녀에게는 말씀과 기도, 예배와 섬김, 구원과 회개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개념을 가르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고, 죄 사함과 구원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을 함께 살아내는 곳이다. 부모가 먼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자리에 자녀를 초청해야 한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매일 예배의 자리에 아이들을 세운다. 큰 죄인인 부모가 작은 죄인인 아이의 손을 잡고 빛과 진리 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가정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 부모 자녀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가정예배 자체가 자녀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복음이 자녀를 붙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 은혜로 살아가도록 날마다 복음의 자리에 우리 자녀들을 세워야 한다.
5. 하루살이 예배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특별하고 대단한 예배의 자리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큰 기적과 이적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지만 소소한 일상 가운데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깨닫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은혜로 함께하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 다. 거룩한 성전인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예배받길 원하신다. 화려하고 주목받는 자리가 아닌 삶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최고의 예배가 아닐까. 진정한 예배자라면 삶의 구석구석에 예배가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밥하고 설거 지하는 예배자, 청소하고 빨래하는 예배자, 허드렛일하는 예배자,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간다. 하루하루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하루살이 ‘엄마 예배자’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일용할 은혜, 감사, 회개, 용서, 사랑, 겸손, 기쁨, 자비, 절제, 충성, 인내 등 모든 것을 간구하며 삶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예배자가 되길 소망한다. 내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되도록 그분을 경외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 매일 나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때 내 삶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 처소가 될 줄 믿는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예배 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길 바란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다 보시고 중보하 며 기다리신다. 많은 가정이 가정예배가 중요하고 귀한 걸 알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며 어려움을 토 로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어떻게든 지켜내면 가정에 큰 변화가 임하는 걸 본다. 물론 가정예배가 가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 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가정의 변화를 주도하시고 그분을 더욱 의지 하는 경건한 삶으로 신실하게 인도하신다. 가정마다 주님의 호흡이 필요한 순간이 반 드시 있다. 그 순간을 침묵하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분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붙들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몇 번이든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단 분주한 삶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영적 심박수가 느려지고 응급치료가 필요한 순간, 우리를 지으시고 지키시며 치유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응급실로 달려가야 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가정예배의 자리다. 여호와를 송축하며 나아갈 때 주치의 되시는 주님께서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며,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실 것이다(시 103:1-5).
우리는 일주일 동안 168시간을 산다. 이 중에 주님과 호흡하는 시간, 온 가족이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 앞에 머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자녀들에게 복음과 신앙을 전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얼마만큼 투자하고 있을까.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주님이 허락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에 자녀에게 예배가 흘러가도록 사활을 걸어야 한다. 어리면 어린 대로, 장성하면 장성한 대로 ‘지금이 마지막일 수 있다’라는 경각심을 갖고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으니 말이다.
(출처: <교육교회> 2022년 5월호에 실린 백은실 사모의 "가정예배로 세워지는 작은 교회"를 다듬어 올린 내용임을 밝힙니다.